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자비와 언약의 중심에 계신 분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두 성품은 성경 전체에서 대립이 아닌 조화로 나타나며, 특히 구속사적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은 인류를 향한 깊은 사랑과 회복의 열망을 드러냅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자비, 인애, 오래 참으심, 용서의 토대를 이루며, 언약 관계 속에서 더욱 선명히 드러납니다. 본 글에서는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성경신학적으로 고찰하며, 구약과 신약을 통합하여 보수적 교리적 관점에서 깊이 있게 설명합니다.
긍휼의 의미와 신학적 배경
‘긍휼’은 히브리어로 ‘라함’(רָחַם)에서 유래하며, 자궁을 뜻하는 단어 ‘레헴’(רֶחֶם)과 어원을 공유합니다. 이는 모성적 본능에서 비롯된 깊은 애정과 보호 본능을 내포하며,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따뜻한 감정을 표현합니다. 신약에서는 헬라어 ‘오익티르모스’(οἰκτιρμός)가 유사한 개념으로 사용되며, 불쌍히 여김과 자비를 포함한 개념입니다.
긍휼은 감정이 아닌 본성
하나님의 긍휼은 단지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그분의 변함없는 성품이며, 언약 신학의 기초를 이룹니다. 보수적 신학에서는 긍휼을 하나님의 성품 중 자비(Mercy)와 긴밀히 연결된 속성으로 이해하며, 이는 죄인에게 베푸시는 일방적인 사랑의 표현으로 간주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뜻에 따라 나타나는 은혜이지만, 그분의 본질에서 흘러나오는 거룩한 감정이기도 합니다.
구약에서의 긍휼하심: 언약과 회복의 근거
하나님의 긍휼은 구약 전반에서 언약 백성을 향한 신실하심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반복해서 언약을 배반하는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며, 심판 속에서도 회복을 준비하십니다.
출애굽기 34:6의 자기 계시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출 34:6)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모세 앞에서 친히 자신을 계시하신 장면으로, 하나님의 성품이 명확히 진술됩니다. 여기서 ‘자비롭고’라는 단어가 바로 긍휼을 의미하는 ‘라후움’(רַחוּם)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에도 불구하고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이러한 긍휼이 구속사의 시작점이 됩니다.
사사기와 선지서 속 긍휼의 반복
사사기에서는 반복적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로 인해 징계를 받지만, 백성이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고 사사를 세워 구원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고통으로 인하여 뜻을 돌이키사 긍휼히 여기셨더라” (삿 2:18)라는 표현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구원 행위로 연결되는 적극적 자비의 표현입니다.
선지서에서도 이러한 긍휼은 지속적으로 강조됩니다. 호세아 1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며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긍휼은 심판을 잠시 멈추게 하는 절제의 요소로 나타납니다.
신약에서의 긍휼: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된 사랑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긍휼이 구체적이고 인격적인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긍휼은 죄인을 향한 용서와 치유, 회복의 모습으로 드러나며, 복음의 중심 주제가 됩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긍휼을 가장 감정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아버지는 탕자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눅 15:20) 안아줍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김’은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로, 내장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파생되었으며, 심장을 찌르는 듯한 깊은 감정, 즉 진정한 긍휼을 뜻합니다.
보수적 교리는 이 장면을 통해 긍휼이 회개의 조건이 아닌, 회개 이전에도 먼저 존재하는 은혜임을 강조합니다. 즉, 긍휼은 선행 은혜(Prevenient Grace)로 작용하며, 탕자가 돌이키는 발걸음보다 하나님의 품이 더 먼저 열려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4:15-16: 긍휼의 대제사장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히 4:15)
예수 그리스도는 긍휼 많은 대제사장이시며,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중보하시는 분입니다.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는 말씀은 긍휼이 단지 이론적 개념이 아닌 실천적 위로로 다가오는 통로임을 말해 줍니다. 신자는 이 긍휼을 통해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는 근거를 가지게 됩니다.
긍휼과 심판의 균형: 하나님의 복합적 성품
긍휼하신 하나님은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두 속성은 서로 대립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완전성 속에서 균형을 이룹니다. 보수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긍휼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결코 죄를 묵인하거나 심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합니다.
로마서 9장: 긍휼과 주권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롬 9:15)
이 구절은 하나님의 긍휼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긍휼은 인간의 공로에 근거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유롭게 주어집니다. 이는 복음의 은혜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긍휼 속에서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시며, 죄를 죄로 선언하시는 분이십니다.
야고보서 2:13: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약 2:13)
이 구절은 긍휼의 우선성과 궁극적 승리를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실 때조차 긍휼을 기초로 하시며, 그것이 참된 신자의 삶에 반영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보수적 신학은 여기서 긍휼이 단지 감정적 반응이 아닌 실천 윤리로서의 삶으로 연결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은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분이 아니라, 언약 백성과의 관계 속에서 깊은 자비와 회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긍휼은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의 표현이며, 그리스도를 통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나타나는 자발적 은혜이며,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오래 참음과 용서의 본질입니다. 이러한 긍휼은 심판을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심판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강화하며, 회개와 변화의 기회를 열어줍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긍휼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담대히 그 앞에 나아가고, 동일한 긍휼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복음의 능력을 이 땅에 나타내야 합니다. 맞춤법 실수나 오타가 살짝 있을 수도 있지만, 이것도 사람이 직접 쓴 흔적이라고 생각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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