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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주해

학개 강해 1:1–15

by πάροικος 2025.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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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개 1:1–15 강해

 

성전의 우선순위를 회복하는 은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함께 모여 마음을 낮추는 이 시간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붙들어 주셨고, 또 말씀으로 새롭게 하시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학개 1장 말씀을 통해, 포로 귀환 이후 백성들이 성전을 방치해 두었던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다시금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깨우시는 장면을 살펴보게 됩니다(학 1:1–15). 이 본문은 단지 과거의 역사 기록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심령 안에서 어떤 우선순위가 무너져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살아 있는 말씀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성전이 어떻게 세워지는지를 보여주는 구속사적 말씀입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 여러분의 중심이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고, 잃어버린 예배의 자리, 무뎌진 영적 민감성, 그리고 무너진 성전의 기초가 다시금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현실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학 1:1)

학개서는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상황에서 시작됩니다.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학 1:1)라고 할 때, 하나님은 인간의 시간과 역사 속으로 말씀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임하다’라는 동사 하야(הָיָה)는 단순히 말씀이 “전달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역사의 현장 속으로 침투했다는 강력한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 상황 한가운데에 찾아오시는 실존적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귀환 백성들은 성전 재건을 시작했지만 여러 반대와 어려움 속에서 손을 놓고 자기 삶을 꾸리는 데만 바빠졌습니다. 그들의 일상은 빠듯했고, 생계는 불안했고, 시대는 불투명했습니다. 그러한 시간 속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향해 침묵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학개서가 시작되는 자리이며, 오늘 우리가 말씀 앞에 서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무너질 때,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순간에 더 깊이 우리의 삶을 찾아오셔서 말씀을 건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말씀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그 은혜의 증거입니다.

변명으로 고착된 무기력함을 깨뜨리시는 하나님 (학 1:2–6)

주님은 백성들의 변명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학 1:2)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시기’라는 말 에트(עֵת)는 단순히 시간이 아니라 우선순위와 마음의 방향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현실이 어려워서 성전을 짓지 못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하나님보다 자기 삶을 우선시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때가 내 집을 지을 때가 아니라고 하느냐”라고 반문하시며, 오히려 “너희는 판벽한 집에 거주하면서도, 내 집은 황폐하였다”(학 1:4)고 책망하십니다. ‘황폐하다’는 하레브(חָרֵב)는 버려진 상태, 영적 메마름을 암시합니다. 겉으로는 집을 꾸미고 살아가지만, 실제로는 영혼의 중심이 메말라 있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학 1:5)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살피라”라는 (שִׂים)은 ‘마음에 두어 깊이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단순한 자기반성이 아니라 영혼의 진단을 요구하는 영적 명령입니다.

그들이 겪었던 흉작, 부족함, 불안은 단순히 기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뒤로 밀어놓은 삶의 구조가 낳은 영적 결핍이었음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삶에서도 하나님보다 직장, 생계, 인간관계, 성취가 더 중심이 될 때, 겉으로는 분주해도 영혼은 텅 비고, 미래는 불안한 메마름이 찾아옵니다. 성경은 이것을 영적 질서의 붕괴라고 말합니다. 학개의 설교는 이 붕괴를 똑바로 보라고 촉구합니다.

순종은 언제나 회복의 출발점입니다 (학 1:7–12)

하나님은 다시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학 1:7)고 반복하시며, 이번에는 아주 구체적으로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학 1:8).

여기서 “산에 올라가라”는 동사 알라(עָלָה)는 ‘영적 상승,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을 상징합니다. 성전을 세운다는 것은 단순히 건축 행위가 아니라 삶의 중심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높임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학 1:8)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기뻐하다”라는 단어 라차(רָצָה)는 ‘받아들여 기쁘게 여기다’, “영광” 카보드(כָּבוֹד)는 ‘무게, 존귀, 임재’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이 다시 백성의 한가운데 임재하시는 사건이 성전 재건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가장 놀라운 구절은 1장 12절입니다.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모든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였으니…”(학 1:12)

여기서 “청종하다”라는 샤마(שָׁמַע)는 ‘듣고 따르다’, ‘전 존재를 기울여 받아들이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깨뜨리고 순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핵심적인 선언이 이어집니다.
“여호와가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학 1:14)
“감동시키다”라는 동사 에르(עֵר) 는 ‘일으키다, 깨우다, 영적 각성을 일으키다’라는 의미입니다.
순종의 본질은 인간의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깨우심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흔들어 움직이시자, 백성들은 오랜 무기력에서 깨어나 성전 건축에 단합하여 참여하게 됩니다.

이 장면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께서는

  • 잃어버린 예배,
  • 방치된 성전,
  • 무너진 공동체를
    단지 명령으로만 회복시키지 않으시고, 성령의 역사로 마음을 일으키셔서 순종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신약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교회가 세워지는 사건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다시 ‘성전’을 세우십니다 (학 1:13–15)

말씀을 바로잡고 순종이 일어난 후, 하나님은 학개를 통해 아주 짧지만 결정적인 말씀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학 1:13)
여기서 “함께하다”라는 동사 에흐예(אֶהְיֶה)는 출애굽기 3:14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어근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임재가 회복되었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은

  • 경제적 회복 이전에,
  • 환경이 바뀌기 이전에,
  • 성전이 완성되기 이전에
    먼저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무너진 성전도 회복되고, 메마른 삶도 생기를 얻고, 흩어진 의지도 하나로 모입니다. 포로 귀환 세대에게 “함께하심”은 그들 눈앞에 보이는 현실보다 더 강력한 미래를 열어주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구속사적으로 볼 때, 이 ‘함께하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마누엘”(마 1:23)로 오심으로 완전하게 성취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의 몸이 성전이 되는 은혜로(고전 3:16) 확장됩니다.
학개서의 이 장면은 단순한 건축 재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다시 성전을 세우시는 더 큰 구속사적 사건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마무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학개서 1장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세 가지를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 속으로 직접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둘째, 우리의 메마름과 부족함은 하나님보다 앞세운 우선순위의 왜곡에서 시작됩니다.
셋째, 회복은 인간의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시키심으로 시작되며, 그 결론은 언제나 “내가 너희와 함께하노라”는 임재의 약속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방치된 성전은 무엇입니까.
기도의 자리입니까. 예배의 중심입니까. 말씀에 대한 갈망입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하노라.”

여러분의 심령 속에 다시 성전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학개서 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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