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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와교회사/교리공부

[기초 교리] 기독교란 무엇인가

by πάροικος 2026.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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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는 새 생명의 복음

기독교는 너무 익숙한 이름이어서 오히려 그 뜻을 놓치기 쉽다. 어떤 사람에게 기독교는 교회에 다니는 일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착하게 사는 윤리이며, 또 다른 사람에게는 어려울 때 위로를 얻는 종교이다. 물론 기독교 신앙은 예배와 도덕, 위로와 관계가 없는 신앙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만으로 기독교를 설명하면 중심을 잃게 된다. 교회에 출석한다고 자동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복음의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안디옥의 제자들에게 처음 사용되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분의 이름에 속한 사람들로 알려졌다(행 11:26). 그러므로 기독교란 막연히 하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성부·성자·성령 삼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구원하신 복음을 믿고, 성령 안에서 새 삶을 살아가는 신앙이다.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는 길을 찾아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인간에게 내려오신 이야기이다.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 부활, 그리고 다시 오심의 약속이 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의 신앙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왔다.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성이 아니라 직분을 가리키는 칭호이다. 헬라어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는 히브리어 메시아(מָשִׁיחַ), 곧 ‘기름부음 받은 이’를 옮긴 말이다. 구약에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았다. 예수님은 이 모든 직분을 온전히 이루시는 참된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계시하시는 선지자이시며,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시고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제사장이시며,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는 왕이시다(신 18:15; 히 4:14-16; 계 19:16).

따라서 기독교는 예수님을 위대한 스승이나 도덕적 모범 가운데 한 분으로 존경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곧 죄인에게 생명을 주시는 주로 믿고 고백하는 신앙이다. “예수는 주”라는 고백은 단순한 종교적 감탄이 아니라, 내 삶의 최종 주권이 나 자신이나 세상의 성공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있다는 믿음의 선언이다(롬 10:9).

기독교의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영원히 계시는 삼위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구원의 뜻을 세우시고, 성자는 그 뜻을 이루시며, 성령은 그 구원을 믿는 자 안에 실제가 되게 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 베풀도록 보내셨다(마 28:19). 삼위일체는 세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이 아니라, 한 하나님 안에 성부·성자·성령 세 위격이 구별되되 참 하나님으로 영원히 함께 계신다는 성경적 고백이다.

창조주주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문제

기독교가 먼저 묻는 질문은 “어떻게 더 행복해질 것인가”가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 “나는 누구이며, 왜 구원이 필요한가”를 묻는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선포한다(창 1:1, 27). 인간은 우연한 존재도, 자기 욕망만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도 아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뜻 안에서 이웃과 세상을 돌보도록 지음 받은 존재이다.

그러나 창세기 3장은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신뢰하기보다 스스로 선악의 기준이 되려 했음을 보여 준다(창 3:1-7). 죄는 단지 나쁜 행동 몇 가지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려는 반역이다. 그 결과 인간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관계와 사회 구조까지 죄의 상처를 입게 되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한다(롬 3:10-12, 23).

개혁주의 신학이 말하는 전적 타락은 모든 사람이 가능한 한 최악의 악을 행한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선의 흔적, 양심, 질서와 아름다움의 가능성까지 부정하는 말도 아니다. 다만 죄가 인간 존재 전체에 영향을 미쳐, 인간이 자기 힘만으로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하고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뜻이다. 죄는 노력과 교육만으로 고칠 수 있는 습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데서 비롯된 영적 죽음의 문제이다(엡 2:1-3).

그러므로 기독교의 복음은 인간에게 조금 더 노력하라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길이 필요하다고 선포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에 은혜가 필요하다. 이 은혜는 죄를 대충 덮어 주는 관용이 아니라, 죄의 값을 담당하시고 죄인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중심

기독교의 중심은 원칙이 아니라 인격이며, 그 인격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요한복음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증언한다(요 1:1, 14).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시다. 그분은 인간의 몸과 영혼, 기쁨과 눈물, 시험과 고난을 실제로 경험하셨으나 죄는 없으셨다(히 4:15).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온 인류를 구원할 능력이 없고, 참 인간이 아니시라면 인간을 대표하여 순종하고 죽으실 수 없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그러나 그분의 사역은 사람들에게 좋은 삶의 원칙을 가르치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오셨다고 말씀하셨다(막 10:45).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죄를 가볍게 넘기는 장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함께 드러난 사건이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되, 그 심판을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으로 담당하게 하심으로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다(롬 3:23-26).

이 때문에 구원은 오직 은혜로 주어진다. 우리는 선행이나 경건의 양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는다. 믿음은 공로가 아니라 빈손이다. 그 손으로 우리는 나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붙든다. 바울은 사람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가르친다(롬 3:28; 갈 2:16).

복음은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죽으셨고 장사되셨으며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복음의 핵심으로 전하며,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다고 말한다(고전 15:3-8, 17). 부활은 단지 예수님의 정신이나 가르침이 계속된다는 뜻이 아니다. 죽음의 권세가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새 생명의 길이 열렸다는 하나님의 선언이다(롬 4:25).

성령과 교회 안에서 누리는 새 생명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은 성령의 역사로 우리 안에 적용된다. 누구도 단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거나 교회 문화에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3:3-8). 거듭남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감정적 결심이 아니라, 성령께서 굳은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복음을 믿게 하시는 은혜의 역사이다(딛 3:4-7).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회개와 믿음으로 부르신다. 회개는 단순히 후회하거나 죄책감을 느끼는 일이 아니라, 죄의 길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방향 전환이다. 믿음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나를 위한 구원으로 의지하는 신뢰이다. 하나님은 이 믿음 안에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자녀로 받아들이신다(롬 8:14-17).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곧바로 완전해지지 않는다. 성령은 말씀과 기도, 예배와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우리를 조금씩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신다. 이를 성화라고 부른다. 성화는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은혜의 열매이다(엡 2:8-10; 빌 2:12-13). 그러므로 성도의 삶에는 넘어짐도 있으나, 죄와 화해하지 않고 다시 그리스도께 돌아가는 회복의 길이 있다.

이 새 생명은 결코 개인적 체험에만 머물지 않는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교회라는 언약 공동체 안으로 부르신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도의 가르침과 교제, 떡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행 2:42). 교회는 건물이나 종교기관의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백성이 함께 예배하고 서로 돌보며 세상 가운데 복음을 증언하는 공동체이다(엡 2:19-22; 벧전 2:9-10).

창조에서 새 창조까지 이어지는 한 이야기

기독교는 조각난 종교 지식의 모음이 아니다. 성경은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라는 큰 흐름으로 하나님의 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님은 선한 세상을 창조하셨고, 인간의 죄로 세상은 깨어졌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시작하셨고, 마침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창 1:31; 롬 5:12; 골 1:19-20; 계 21:1-5).

이 큰 흐름은 기독교가 현실 도피의 종교가 아님을 보여 준다. 성경의 마지막 소망은 몸을 벗어난 영혼이 어딘가로 도피하는 데 있지 않다. 죽은 자의 몸이 부활하고, 죄와 죽음과 슬픔이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데 있다(고전 15:42-44, 52-57; 계 21:3-4).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새 창조의 첫 열매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죽음 이후만을 생각하게 하지 않는다. 오늘의 몸, 가정, 일, 이웃, 사회와 피조세계를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게 바라보게 한다. 성도는 세상을 구원할 힘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을 믿기에, 정의를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며,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한다(미 6:8; 골 3:23-24).

교회는 이 복음을 어떻게 고백해 왔는가

교회는 성경 밖에서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다만 복음이 왜곡되는 시대마다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를 더 분명한 언어로 고백해 왔다. 사도신경은 성부의 창조, 성자의 성육신·고난·부활·재림, 성령과 교회와 몸의 부활을 한 흐름으로 고백한다. 이는 기독교 신앙이 무엇을 믿는지 가장 간결하게 보여 주는 교회의 고백이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을 단지 피조물이나 위대한 인간으로 낮추려는 견해에 맞서, 니케아 신경을 통하여 성자께서 성부와 같은 본질의 참 하나님이심을 고백했다. 이어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성령의 신성을 더욱 분명히 고백했다. 칼케돈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위격 안에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의 두 본성을 혼합이나 분리 없이 지니신다고 정리했다. 이 신조들은 성경보다 높은 권위가 아니지만, 요한복음과 바울 서신이 증언하는 그리스도를 교회가 보존하려 한 역사적 고백이다(요 1:1, 14; 빌 2:6-8).

종교개혁은 교회가 인간의 전통과 공로를 복음 위에 올려놓을 수 없음을 다시 선포했다. 성경은 신앙과 생활의 최종 기준이며, 구원은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다는 고백이 새롭게 강조되었다(딤후 3:16-17; 엡 2:8-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성경의 권위와 충족성,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 교회, 부활과 마지막 심판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 8장, 25장, 32-33장). 신앙고백서는 성경을 대신하지 않지만, 교회가 성경을 어떻게 읽고 고백해 왔는지 살피게 하는 유익한 안내자이다.

기독교를 흐리는 몇 가지 오해

기독교를 “착하게 살면 되는 종교”로 이해하는 것은 가장 흔한 오해이다. 선한 삶은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선행은 죄인을 구원하는 사다리가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 안에서 맺히는 열매이다. 복음은 먼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선포하고,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친다(엡 2:8-10).

기독교를 개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영성으로만 보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은 개인을 구원하시지만 고립된 개인으로 남게 하지 않으신다. 성도는 교회의 말씀과 예배, 권면과 사랑 안에서 자라며,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간다(고전 12:12-27). 교회의 연약함과 상처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공동체 자체가 불필요해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죄에 대한 무조건적 용납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을 그대로 방치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심판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는 거룩한 사랑이다(롬 5:8; 벧전 1:15-16). 반대로 거룩함을 강조한다며 은혜를 잊어버리는 율법주의도 복음에서 벗어난다. 성도는 자신의 성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며, 감사와 사랑으로 순종한다.

마지막으로 천국을 현실과 무관한 사후 세계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의 궁극적 소망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새 창조이며, 그 소망은 오늘의 삶을 더 책임 있게 살게 한다. 우리는 이 땅의 성공을 절대화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회복하실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간다(롬 8:18-25).

복음은 삶을 붙드는 가장 깊은 토대이다

기독교란 삼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구원하시고, 성령으로 새 생명을 주시며, 교회 안에서 자라게 하시고, 마침내 새 창조의 소망으로 인도하시는 복음의 신앙이다. 이 진리는 머리로만 외우는 종교 지식이 아니다. 내가 누구의 피조물인지, 왜 죄와 죽음이 두려운지, 어떤 은혜로 용서받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죽음 너머에 무엇을 소망해야 하는지를 밝혀 주는 삶의 토대이다.

이 진리를 믿는 사람은 예배에서 하나님을 소비하지 않고 경배하게 된다. 기도에서 자기 계획만 관철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된다. 죄 앞에서는 자신을 변명하기보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회개하게 된다. 고난 속에서는 모든 이유를 다 알지 못해도, 죽음까지 이기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붙드신다는 사실을 소망하게 된다(롬 8:31-39).

교리를 배우는 목적은 다른 사람보다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을 더 바르게 알고, 그리스도를 더 깊이 사랑하며, 성령 안에서 교회와 세상을 섬기는 데 있다. 기독교의 첫걸음은 “나는 무엇을 이루어 하나님께 나아갈 것인가”를 묻는 데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위하여 무엇을 이루셨는가”를 듣고 믿는 데 있다.

묵상과 적용

  • 나는 기독교를 교회 문화나 도덕적 습관으로 이해해 왔는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 내가 죄와 실패를 만날 때 나의 노력과 감정에 먼저 의지하는가, 아니면 은혜로 죄인을 받아 주시는 그리스도께 돌아가는가?
  • 몸의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을 믿는다면, 오늘 나의 예배와 관계, 일과 물질 사용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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