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사하시고 부르시는 주의 권세
마태복음 9장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권세가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입니다. 이 장은 병자 치유와 귀신 축출, 죽은 자의 소생, 죄 사함과 제자 부르심, 금식 논쟁과 추수의 비유까지 다양한 사건이 연속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장면은 단지 기적의 나열이 아니라, 예수께서 죄로 깨어진 인간의 삶에 어떻게 다가오시는지를 보여주는 구속사적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실 수 있는 분만이 아니라,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죄 사함의 권세: 중풍병자 사건
9장의 시작은 중풍병자 치유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여 예수께 데려오자,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환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9:2).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기 전에 먼저 “죄사함”을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사역이 단순히 외적인 고통을 치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 내면의 죄 문제를 다루는 데 그 본질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죄사함을 받았다’는 선언은 단지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선언입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은 이 말씀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했고, 속으로 의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너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하시며,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 말씀하시며 실제로 병을 고치십니다. 이는 예수께서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가지고 계심을 외적인 기적을 통해 증거하신 것입니다.
헬라어로 ‘죄를 사하다’는 표현은 ‘ἀφίενται’(아피엔타이)로, ‘멀리 보내다’, ‘해방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죄가 인간에게 미치는 실질적인 속박과 고통을 예수께서 끊어내시는 권세를 가지셨다는 뜻입니다. 병은 때로 죄의 결과로 나타나며, 모든 고통의 뿌리는 결국 인간의 타락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뿌리를 건드리십니다. 우리가 그분께 나아갈 때, 단지 환경의 회복이 아닌, 근본적인 죄의 문제 앞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죄인을 부르시는 메시아: 마태의 부르심과 금식 논쟁
중풍병자를 고치신 후, 예수님은 마태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는 한 마디에 마태는 세관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는 단지 직장을 바꾼 사건이 아니라, 삶의 방향과 가치를 전환하는 회심의 역사입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의 세금을 대신 징수하는 자로, 동족에게 배신자 취급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마태를 부르시고, 마태는 그 부르심에 순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본질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복음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시는 은혜의 초대입니다.
예수님이 마태의 집에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자, 바리새인들은 비난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고 하시며,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9:13)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호세아 6장 6절 “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는 구절의 인용입니다. 종교적 형식이나 제의보다, 하나님은 죄인을 향한 긍휼의 마음을 더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금식 논쟁에서도 예수님은 신랑과 함께 있는 혼인 잔치의 비유로 대답하십니다. “신랑이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9:15). 예수님의 오심은 기쁨의 도래이며, 복음은 슬픔의 율법이 아니라, 새롭게 되는 생명의 은혜입니다. 낡은 옷에 새 천을 붙이거나,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을 수 없다는 말씀은, 복음이 단지 기존의 율법 체계 위에 덧붙여지는 보완물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생명력이라는 것을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언약의 중심이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믿음을 세우시는 주
9장 후반부에는 두 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고, 또 하나는 회당장의 죽은 딸입니다. 이 둘은 모두 사회적, 종교적으로 ‘부정한’ 존재였습니다. 혈루증 여인은 12년 동안 고통받으며, 모든 수단이 소용없었고, 회당장의 딸은 이미 죽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혈루 여인은 “그의 옷자락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믿음으로 나아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손길을 느끼시고 말씀하십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9:22). 여기서 ‘구원하다’는 단어는 ‘σῴζω’(소조)로, 단순히 병의 치유만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녀는 단지 병을 고침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딸로 회복되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그 집에 들어가시고, 죽은 소녀의 손을 잡고 일으키십니다.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씀은 단지 생명 회복이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는 메시아의 능력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복음은 절망의 끝에서도 생명을 일으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주님의 손 안에서 새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예수님은 눈먼 자들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자를 고치십니다. 이 모든 사역은 단지 동정심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임하고 있다는 표징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오셔서 육체와 영혼, 시공을 넘는 회복의 능력을 보이십니다. 그리고 그 회복은 오직 믿음을 통해 경험됩니다. 믿음 없는 자는 그 기적을 보아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지만, 믿음의 눈을 가진 자는 주님의 손끝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봅니다.
결론: 추수할 일꾼을 부르시는 주님의 눈물
9장의 마지막은 예수님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9:36). 여기서 ‘불쌍히 여기시다’는 헬라어 ‘σπλαγχνίζομαι’(스플랑크니조마이)는 내장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하는 연민의 감정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피상적 감정이 아니라, 가장 깊은 자리에서부터 우러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9:37-38).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결국 이 요청으로 향합니다. 그분은 홀로 일하시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가십니다. 그리고 그 일에는 지금도 동참할 자들을 부르십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앞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단지 기적을 구하는 자입니까, 아니면 그 기적 속에서 하나님을 보는 자입니까? 우리는 병고침만을 원합니까, 아니면 죄사함과 회복을 사모합니까?
예수님은 죄를 사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며, 믿음 없는 자를 깨우시고, 믿는 자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분은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우리는 그 부르심 앞에 어떤 반응을 드릴지, 말씀 앞에 정직하게 서야 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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