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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주해

마태복음 18장 주요 주제와 해설 묵상

by πάροικος 2025.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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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질서, 가장 작은 자를 돌보시는 큰 은혜

마태복음 18장은 제자 공동체, 곧 교회 안에서의 삶의 자세와 태도에 대해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질서와 정반대의 방식으로 움직입니다. 높아지려면 낮아져야 하고, 잃어버린 자 하나를 끝까지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이 장은 ‘교회의 헌법’이라 불릴 만큼 공동체 안에서의 용서, 권면, 사랑, 치리를 깊이 있게 다루며, 하나님 백성이 가져야 할 성품과 관계의 원리를 근본부터 재정립합니다.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근본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우리는 본장을 통해 하난님의 나라를 더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죄기를 원합니다.

 

가장 작은 자를 품는 하나님의 나라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묻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18:1). 이 질문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제자들이 이미 천국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지만, 여전히 그 천국을 세상의 질서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드러냅니다. 누가 더 높으냐는 경쟁적 시각이 그들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8:3). 여기서 ‘돌이켜’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στραφῆτε’(스트라페테)인데, 이는 방향 전환, 회심을 의미합니다. 천국은 단순히 윤리적 변화가 아니라 전적인 가치 전환, 즉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변화 없이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는 유대사회에서 사회적 권리나 영향력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하십니다(18:4). 이것은 단지 겸손이라는 성품을 넘어서, 천국 백성의 정체성이 전적인 은혜에 의존한 자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크고 작음은 사역의 역할이나 능력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신을 얼마나 낮추고 주님 앞에 설 수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영접하는 자는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 하십니다(18:5). 교회 공동체는 이런 낮은 자, 작고 보잘것없는 자들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반대로, 그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는 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경고하십니다(18:6). 이는 예수님의 가장 강한 언어 중 하나로, 작은 자를 해치는 죄에 대해 얼마나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교회는 약하고 상한 자들을 위한 공간이어야 합니다. 어린아이 하나도 결코 가볍게 여겨지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는 모든 존재를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죄와 실족, 그리고 공동체의 권면

예수님은 실족의 문제에 대해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은 있기 마련이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18:7). 우리는 종종 죄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며 핑계를 대지만, 주님은 분명히 경고하십니다. 그 죄가 누구를 통해 시작되는가에 하나님은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 손이나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는 극단적 표현으로 죄에 대한 단호한 태도를 명령하십니다(18:8-9). 물론 이는 자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대하는 철저한 결단을 요구하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죄는 결코 방치되어서는 안 되며, 개인과 공동체를 병들게 하는 치명적인 독소이기에 반드시 다루어져야 합니다.

이어 예수님은 한 마리 양을 잃은 목자의 비유를 드십니다.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이 목자는 곧 우리 주님이십니다(18:12-14). 이는 공동체의 회복에 있어 가장 중심이 되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줍니다. 교회의 목적은 정죄가 아니라 회복입니다. 죄로부터 벗어난 자가 다시 하나님의 품 안에 돌아오도록 돕는 것이 교회의 진정한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죄를 범한 형제를 대하는 구체적인 방식, 곧 ‘권면의 절차’를 말씀하십니다(18:15-17). 형제가 죄를 범하면 먼저 개인적으로 권면하고, 듣지 않으면 두세 증인을 데리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 앞에 알리고, 마지막까지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치리를 통한 배제를 위한 절차가 아니라, 최대한의 회복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순서입니다.

교회는 거룩함을 지켜야 하지만, 동시에 사랑으로 형제를 품어야 합니다. 이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말씀의 원리에 따라 형제를 권면하고, 공동체의 거룩함을 지켜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혼자 가서 책망하라’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의 수군거림이나 뒷말이 아닌, 사랑 안에서의 진지한 권면을 실천하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8:20) 하시며, 공동체의 권위가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서 이루어짐을 강조하십니다. 교회는 단지 인간의 모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통치가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입니다.

 

용서의 본질,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비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질문합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18:21) 베드로는 관대한 듯 보였지만,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18:22). 이는 무제한의 용서를 뜻합니다.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비유를 드십니다(18:23-35). 한 종이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었고, 갚을 수 없어 탄원하자 임금은 그 빚을 전부 탕감해 줍니다. 그러나 그 종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은 동료를 만나 목을 잡고 갚으라고 독촉합니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임금은 그 종을 다시 불러 꾸짖고, 형벌을 내립니다.

여기서 '일만 달란트'는 천문학적인 액수로, 인간이 갚을 수 없는 죄의 무게를 상징합니다. 반면 '백 데나리온'은 일상적인 액수로, 사람 간의 죄와 상처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난 죄를 용서받은 자가, 형제에게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복음의 본질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셨다는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그 복음을 받은 자는, 다른 이를 용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결국 복음을 진정으로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18:35)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경고입니다.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복음을 받은 자에게 주어진 당연한 삶의 열매입니다.

 

결론: 가장 작은 자를 위한 교회, 용서로 세워지는 공동체

마태복음 18장은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높아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가장 낮은 자처럼 자신을 낮추십시오. 죄와 실족이 있습니까? 그러면 형제를 품고 회복시키십시오.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까? 복음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공동체는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곳이 아니라, 회복과 용서가 흐르는 생명의 자리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자를 귀하게 여기고, 죄인을 향해 정죄가 아닌 회복의 손을 내밀며, 무한한 하나님의 용서를 본받아 끝까지 품고 용서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흘러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교회는 그런 공동체입니까? 내가 섬기고 있는 자리에서 작은 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나를 실족하게 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로서, 복음을 받은 자답게 용서하고, 품고, 함께 걸어가는 주님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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