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룩을 끝까지 지키라—언약을 붙들고 삶을 성결히 하는 믿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배의 자리에 오신 모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자리에 온 것을 기억하시고,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은 느헤미야서의 마지막 장면인 13장 15절부터 31절까지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는 하나님 백성이 회복 이후에도 계속해서 깨어 있어야 한다는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성벽이 세워지고, 예배가 회복되고, 공동체가 새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타락이 스며드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 전반에서 무너진 언약을 다시 바로 세우기 위해 강력한 개혁을 단행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도 삶 안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안식일이 무너진 현실—거룩한 리듬이 사라질 때(느 13:15–18)
본문은 안식일에 일어난 심각한 타락을 보여줍니다.
“그 때에 내가 유다에서 사람들의 안식일에 포도주 틀을 밟으며… 온갖 짐을 싣고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으므로”(느 13:15)
백성들은 안식일에 농사 일을 하고, 장사를 하며, 짐을 나르고, 무역을 했습니다.
안식일이 더 이상 거룩한 날이 아니라 일상과 다를 바 없는 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안식일’은 히브리어 샤바트(שָׁבַת) 입니다.
뜻은 ‘멈추다’, ‘중단하다’, ‘쉼을 선포하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곱째 날에 쉬신 것이 아니라
‘멈추심을 선언하신 것’이 바로 이 단어입니다(창 2:3).
샤바트는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안에 사는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하는 날입니다.
즉, 신앙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이 정체성을 잃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언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표지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그들을 책망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이렇게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더럽히느냐”(느 13:17)
여기서 ‘더럽히다’는 할랄(חָלַל) 로,
‘거룩한 것을 속되게 만들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인간의 용도로 낮추다’는 의미입니다.
안식일을 더럽힌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거룩한 리듬을 깨뜨리고
삶의 주권을 하나님에게서 자신에게로 옮겨버리는 행동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멈춤 없이 달릴 때 신앙은 무너집니다.
쉼 없이 일할 때 영혼은 메말라갑니다.
거룩한 리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주신 은혜의 질서입니다.
성문을 닫아 안식일을 세우다—느헤미야의 단호한 결단(느 13:19–22)
느헤미야는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순한 설교나 경고만 하지 않습니다.
그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싸움을 시작합니다.
“안식일이 되기 전에 내가 명령하여 성문들을 닫고…”(느 13:19)
여기서 “닫다”는 히브리어 사가르(סָגַר) 로,
‘막아버리다’,
‘통로를 차단하다’,
‘악이 스며드는 길을 봉쇄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도시의 성문을 닫는다는 것은
단순한 행정 조치가 아니라
영적 차원의 ‘영역 구분’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또한 문지기들을 배치합니다(느 13:19).
그리고 안식일 전날부터 성문 앞에 무역 상인들이 진을 치자
그들을 꾸짖어 경고합니다(느 13:20–21).
이어서 레위인들에게 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하여
성문을 지키게 합니다(느 13:22).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개혁이 단순한 소리 지름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실제로 “거룩의 공간”을 확보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어떤 문을 닫아야 할까요?
어떤 통로를 차단해야 할까요?
어떤 유혹을 성문 밖으로 밀어내야 할까요?
거룩은 결단 없이는 세워지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결국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옵소서”(느 13:22)
여기서도 ‘기억하옵소서’는 자카르(זָכַר)—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을 요청하는 기도입니다.
이방 결혼 문제—신앙의 순수성을 무너뜨리는 혼합주의(느 13:23–27)
언약을 공격하는 두 번째 문제는 이방과의 혼인입니다.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느 13:23)
이혼은 민족 문제나 혈통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의 정체성이 혼합되는 문제입니다.
이들의 자녀가 히브리어를 하지 못한 것은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말씀의 언어를 잃어버린 것입니다(느 13:24).
히브리어로 ‘말하다’는 다바르(דָּבַר) 이며,
말씀(דָּבָר)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즉, 히브리어는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고, 예배하며,
하나님 앞에 서는 언어였습니다.
말씀의 언어를 잃은 것은
말씀의 세계에서 멀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그들을 책망하며
“너희가 이 큰 악을 행하여… 언약을 깨뜨렸느냐”(느 13:27)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깨뜨리다’는 히브리어 말알(מָעַל) 로,
‘배반하다’, ‘반역하다’,
‘언약을 파기하는 죄’를 의미합니다.
신앙의 혼합주의는 언약의 반역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언약의 언어를 잃어버리는 순간
신앙은 혼탁해지고,
가치는 흐려지며,
삶의 중심은 무너집니다.
제사장직의 타락—엘리아십 가문을 정결하게 하다(느 13:28–29)
문제는 백성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제사장 가문도 무너졌습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하나가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으므로…”(느 13:28)
산발랏은 성벽 재건을 끝까지 반대하던 사마리아의 지도자였습니다.
즉, 영적 적대자와 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이것은 제사장직의 근본을 흔드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그를 쫓아내어 버렸느니라”(느 13:28)고 말합니다.
쇠퇴한 제사장직을 보며 느헤미야는 다시 기도합니다.
“그들이 제사장직과 레위 사람의 직분을 더럽혔음이라”(느 13:29)
여기서도 ‘더럽히다’는 할랄(חָלַל)—
거룩을 속된 것으로 바꾸다.
성도 여러분,
지도자의 타락은 공동체 전체를 흔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거룩을 지키기 위해
지도자를 새롭게 하시고, 때로는 제거하시며,
공동체를 다시 세우십니다.
조직을 재정비하고 예배를 회복하다—거룩은 끝까지 지켜야 한다(느 13:30–31)
느헤미야는 마지막으로
“이와 같이 내가 그들을 이방 사람을 떠나 정결하게 하고…”(느 13:30)
라고 기록합니다.
정결하게 하다—타하르(טָהֵר)
즉, 다시 거룩의 질서를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 그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해야 할 역할을 다시 회복시키고
정해진 때마다 장작을 준비하는 규례를 세웁니다(느 13:30–31).
이 장작 규례는 레위기적 제사 제도의 핵심으로,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역할이었습니다(레 6:13).
영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과의 언약의 불을 꺼뜨리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느헤미야는 그의 생애 마지막 기록을
이 기도로 마무리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옵소서”(느 13:31)
이 고백 속에는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헌신한 한 사람의
겸손한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마무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느헤미야 13장의 마지막 본문은
신앙의 회복은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안식일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확인하는 거룩한 리듬이다.
-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는 ‘닫아야 할 문’을 닫아야 한다.
- 신앙의 혼합주의는 언약을 파괴하는 길이다.
- 말씀의 언어를 잃으면 신앙의 세계에서 멀어진다.
- 지도자의 타락은 공동체 전체를 흔들기에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 예배의 불은 조직과 헌신으로 유지된다.
- 믿음의 마지막은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옵소서”라는 고백이다.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여러분의 삶 속에서 거룩을 지키는 결단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닫아야 할 문을 닫고,
지켜야 할 언약을 지키며,
꺼지지 않는 예배의 불을 붙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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